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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우마 뉴스레터 · 연구로 읽는 마음
내가 나 같지 않은 느낌
— 해리의 신경과학
Y 트라우마 연구소 · 박도현 소장 · 소매틱 심리치료
이 글은 아래 연구를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Lanius, R. A., Vermetten, E., Loewenstein, R. J., Brand, B., Schmahl, C., Bremner, J. D., & Spiegel, D. (2010). Emotion modulation in PTSD: Clinical and neurobiological evidence for a dissociative subtype. American Journal of Psychiatry, 167(6), 640–647.
힘든 일이 있어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습니다.
내 몸인데 내 몸 같지 않고,
눈앞의 세상이 뭔가 유리 너머처럼 멀게 느껴집니다.
"나는 왜 이렇게 아무 감각이 없을까."
이것이 게으름이나 무관심이 아닙니다.
뇌가 너무 많은 것을 차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PTSD에는 두 가지 얼굴이 있다
캐나다 웨스턴온타리오 대학교와 스탠퍼드, 예일 등 공동 연구팀은 2010년 American Journal of Psychiatry에 중요한 연구를 발표했습니다. PTSD가 하나의 얼굴이 아니라 두 가지 근본적으로 다른 방식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연구는 이후 DSM-5에 해리형 PTSD가 공식 하위유형으로 포함되는 데 결정적인 근거가 되었습니다. 트라우마 후 "왜 나는 아무것도 못 느끼지"라고 스스로를 이상하게 여겨왔던 분들에게, 이 연구는 명확한 신경과학적 설명을 제공합니다.
"해리형 PTSD는 정서의 과잉조절로 특징지어지고,
더 흔한 과소조절형은 재경험과 과각성 증상이 우세하다.
두 유형은 뚜렷이 구별되는
신경생물학적 특징을 가진다."
두 유형의 차이 — 과소조절 vs 과잉조절
Lanius 연구팀은 뇌의 감정 처리 회로 — 특히 전전두엽과 변연계(편도체) 사이의 관계 — 를 중심으로 두 유형을 설명합니다.
PTSD 두 유형의 신경과학적 차이
1
과소조절형 (비해리형) — "꽉 열린 수도꼭지"
전전두엽이 편도체를 충분히 억제하지 못합니다. 트라우마 단서에 노출되면 감정이 압도적으로 터져나옵니다. 플래시백, 과각성, 침습적 기억, 분노 폭발이 특징적입니다. 감정이 너무 강하게 올라오는 상태입니다.
2
과잉조절형 (해리형) — "완전히 잠긴 수도꼭지"
전전두엽이 편도체를 과도하게 억제합니다. 트라우마 단서에 노출되어도 감정 반응이 차단됩니다. 무감각, 이인증(자신이 낯설게 느껴짐), 비현실감(세상이 꿈 같음), 감정적 마비가 특징적입니다. 감정이 아예 올라오지 않는 상태입니다.
연구팀은 이 두 유형이 동시에 또는 번갈아 나타날 수 있다는 것도 강조합니다. 어떤 순간에는 감정이 폭발하고, 다른 순간에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경험은 그래서 낯설지 않습니다.
해리란 무엇인가 — 뇌의 비상 차단 시스템
해리(dissociation)는 단순한 "멍함"이 아닙니다. 연구팀은 해리를 뇌가 감당하기 힘든 감정적 충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작동시키는 비상 차단 시스템으로 설명합니다.
위협이 너무 압도적일 때, 뇌는 그 고통으로부터 의식을 분리시킵니다. 이것이 단기적으로는 생존을 가능하게 합니다. 그러나 이 패턴이 만성화되면 — 트라우마가 지나간 후에도 일상적인 감정 경험 자체가 차단되는 상태가 됩니다.
"슬픈 일이 있는데 눈물이 안 나요.
기쁜 일도 그냥 아무 느낌이 없어요.
내 몸인데 나랑 분리된 것 같고,
가끔 내가 위에서 나를 내려다보는 느낌이에요."
해리의 주요 경험들
○ 이인증(Depersonalization) — 자기 자신이 낯설게 느껴지거나, 내 몸이 내 것 같지 않은 느낌. 마치 나를 밖에서 관찰하는 듯한 경험
○ 비현실감(Derealization) — 주변 환경이 꿈 같거나, 유리 너머처럼 멀게 느껴지는 경험. 세상이 실제가 아닌 것 같은 느낌
○ 감정적 무감각 — 기쁨, 슬픔, 공포 등 감정이 전반적으로 둔해지거나 느껴지지 않는 상태
○ 기억의 공백 — 특정 시간대나 경험이 잘 기억되지 않거나, 기억이 단절된 느낌
왜 특히 만성 트라우마에서 더 많이 나타나는가
Lanius 연구팀은 해리형 PTSD가 단발성 사건보다 만성적인 아동기 학대나 복합 트라우마를 경험한 사람들에게서 더 자주 나타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위협이 반복적이고 피할 수 없는 상황 — 특히 보호받아야 할 관계 안에서 지속적으로 상처받는 상황 — 에서 신경계는 싸우거나 도망치는 것 모두 불가능하다는 것을 학습합니다. 그때 뇌가 선택하는 마지막 방법이 바로 감각과 감정을 차단하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것은
무감각한 사람이어서가 아닙니다.
너무 많은 것을 느껴야 했을 때
살아남기 위해 뇌가 선택한 방법입니다.
해리형 PTSD와 소매틱 심리치료 — 접근이 달라야 하는 이유
Lanius 연구팀의 중요한 임상적 결론은 이것입니다. 해리 증상이 있는 경우, 트라우마에 직접 노출시키는 방식의 접근은 오히려 역효과를 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감정이 이미 차단된 상태에서 더 강한 자극을 주면, 더 깊은 차단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연구팀은 해리 증상을 먼저 평가하고, 단계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필수적임을 강조합니다. 소매틱 심리치료에서도 이 원칙이 중심을 이룹니다.
해리형 PTSD에 소매틱 심리치료가 접근하는 방향
1
먼저 지금 이 순간 몸과 연결하기
해리 상태에서는 몸 감각이 차단되어 있습니다. 발바닥의 느낌, 의자의 감촉처럼 지금 여기의 감각으로 천천히 돌아오는 것이 시작입니다. 트라우마 내용을 다루기 전 단계입니다.
2
안전한 범위 안에서 감각의 창 넓히기
SE™(소매틱 익스피리언싱)에서는 압도되지 않으면서도 감각을 조금씩 허용할 수 있는 범위 — '내성의 창(window of tolerance)' — 를 먼저 확장합니다.
3
차단이 아닌 조절로 — 신경계 재학습
목표는 감정을 억누르는 것이 아닙니다. 감정이 올라올 때 차단하지 않고, 그 강도를 조절하면서 함께 있을 수 있는 신경계 능력을 되찾는 것입니다.
마치며
Lanius 연구팀의 발견은 트라우마 이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경험이 얼마나 과학적으로 설명 가능한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그것은 성격의 문제도, 감정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전전두엽이 변연계를 과도하게 억제하는, 신경계의 보호 반응입니다.
그리고 이 보호 반응은, 안전한 환경 안에서 천천히 다시 조율될 수 있습니다. 차단 대신 조절을, 마비 대신 감각을 — 그것이 해리형 PTSD 회복의 방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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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문헌
Lanius, R. A., Vermetten, E., Loewenstein, R. J., Brand, B., Schmahl, C., Bremner, J. D., & Spiegel, D. (2010). Emotion modulation in PTSD: Clinical and neurobiological evidence for a dissociative subtype. American Journal of Psychiatry, 167(6), 640–647. https://doi.org/10.1176/appi.ajp.2009.09081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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